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문단 편집) === 독일-오스트리아 병합 === 종전 뒤, 변호사로 활동했고 오스트리아의 [[파시즘]] 정당인 [[조국전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처음에는 고문변호사에 지나지않았으나, 히틀러와 오스트리아 조국전선사이에서 접촉업무를 맡으면서 히틀러의 신임을 받게 된다.] 1933년에는 [[엥겔베르트 돌푸스]]내각에 입각하기도 했다. 돌푸스가 암살된 뒤에도 정계에 남아있었으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위해 암약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나치당과도 막후관계를 맺고있었다. 1931년에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한 잉크바르트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오딜로 글로보츠닉]] 등과 함께 나치당의 집권을 위해 노력했고, 동시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주장했다. 1936년 7월 11일에 주 오스트리아 독일 공사이던 [[프란츠 폰 파펜]]의 주선으로 [[아돌프 히틀러]]와 [[오스트리아 연방국]]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엔 비밀조항이 붙어 있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에 내정간섭을 그만두는 대신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온건파를 오스트리아 정부 각료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잉크바르트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에서 온건파의 리더여서 비합법적인 활동은 거부했다. 그는 정부가 자신들과의 협의에 응하지 않으면 폭력적인 불법 활동을 그만둘 수 없다는 급진파 리더 요제프 레오폴트와 대립했다. 슈슈니크 총리도 레오폴트보다는 잉크바르트와의 협의를 좋아했다.[* 히틀러조차도 오스트리아합병문제에 대해서는 합법적 수단을 써야한다는 생각을 내비친 잉크바르트와 논의하기를 좋아했다. 비합법적 수단을 사용해서 징역형을 받은 히틀러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1937년 5월에 슈슈니크 총리는 잉크바르트를 오스트리아 정부의 참사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938년 2월 12일엔 독일의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와 슈슈니크 총리의 회담이 열렸는데 여기서 잉크바르트는 내무장관으로 내정되기로 약정되었다. 슈슈니크는 2월 16일에 잉크바르트를 내무상으로 임명했다. 1938년 2월 26일에 슈슈니크 총리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유지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반발한 오스트리아 나치당이 독일과의 합병을 요구하는 폭동을 일으켰지만 내무장관인 잉크바르트는 이를 단속하지 말라고 오스트리아 경찰에 지시했다. 그 후 슈슈니크는 24세 이상의 국민에게 독일과의 합병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기획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지지자들은 거의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유권자들이었다. 이 계층의 투표를 배제하면 합병안이 부결될 것으로 판단한 슈슈니크는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이 계획의 지지를 구했지만 독일과의 관계악화를 염려한 무솔리니는 여기에 찬동하지 않았다. 이것이 히틀러의 역린을 건드렸다. 슈슈니크의 국민투표안에 불쾌감을 느낀 히틀러는 국방군 최고사령관 육군[[대장(계급)|대장]] [[빌헬름 카이텔]] [[장군]]에게 오스트리아 침략계획인 <오토 계획>의 실행준비를 명령했다. 3월 11일 오전 2시에 독일 육군 부대가 국경으로 출동하자 오스트리아 정부는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 장군에게 국민투표의 연기, 슈슈니크의 수상직 사임, 잉크바르트의 수상 취임, 독일에 질서유지를 요구하는 조건으로 협상했다. 그리고 [[프란츠 폰 파펜]]과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독일외무장관은 친나치의 자이스잉크바르트를 내무장관에 임명하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을 슈슈니크 총리에게 직접 전하였다. 슈슈니크 총리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경찰은 독일추종자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3월 11일 오후 4시, 슈슈니크 총리는 국민투표의 중지와 총리에서 사퇴할 것임을, 즉 '굴복'의 뜻을 라디오로 방송했다. 슈슈니크 총리는 자이스잉크바르트를 후계로 추천했지만, 대통령인 빌헬름 미크라스는 승인을 꺼렸다. 그러나, 『굴복』방송에 힘이 난 각지의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은 빈, 린츠, 그라츠, 인스브루크 등의 지방 정부의 시설에 하켄크로이츠기를 걸었다. 다시 독일은 아직 내무장관이던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파병 요청"을 강요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오후 9시 45분에 파병 요청을 하였다. 끝내 12일이 되기 조금 전, 미크라스 대통령은 마침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총리가 되었고 그는 곧 [[독일 국방군]]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독일 국방군]]은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었으나, 그 과정이 근대 육군의 교과서라던 예전의 명성은 못 찾을 어설픈 모습이었다. 히틀러가 조급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 장군과 차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3일 만에 작전안을 짜서 움직여야 하였으며, 보급과 행군 모두 착오의 연속이었다. 차량들이 오스트리아의 민간 주유소에서 돈을 주고 가솔린을 조달함은 기본이었고, 보병사단들의 행군상황은 [[사단장]]이 예하 제대의 현 위치를 못 파악하였으며, 선봉은 오스트리아 영내에 있는데 후방지원 부대는 병합작업을 진행하는 그 순간에도 독일 국내에서 오스트리아를 향해 행군하는 도중이었다. 이 꼴을 본 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대사관의 [[국방무관]]이 "독일군의 행군 군기는 극히 열악하다"고 지당한 말을 했다. 만약 오스트리아 주민과 오스트리아 육군의 저항이 격렬했다면 병합은 완전히 물건너가는 정도가 아니라 히틀러의 권력조차 붕괴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끝내 독일 육군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저항으로 오스트리아로 진주했고, 대통령에게 사임을 강요하여 수상직에 대통령의 권한까지 대행하게 된 자이스잉크바르트는 3월 13일 빈에서 히틀러와 만나 병합에 관한 법률안에 서명했다. 이후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전역을 접수한 가운데, 형식적인 법 절차로 나치당 감독 아래 4월 10일 국민투표를 했다. 이 투표는 투표지부터 병합 찬성에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어떤 지방에서는 투표소를 경비하는 독일 육군 병력 앞에서 공개투표도 했다고.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진행된 투표는 97% 찬성이라는 결과가 나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